표류기
은희경
Artist
2024. 06.12 ~ 2024. 06. 29
전시 제목인 ‘표류기’는 17세기 항해 중 난파되어 한국에 머물렀던 헨드릭 하멜의 경험을 기록한 한 책 ‘하멜 표류기’에서 비롯한다. 작가는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살았던 스스로의 시간과, 수백 년 전 풍랑에 휩쓸려 조선에서 13년을 체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의 시간을 나란히 두고 바라본다. 그리고 서로의 거울상이 되는 두 사람을 통해 한국과 네덜란드로 표현되는 이곳과 저곳, 17세기와 21세기로 은유되는 그때와 지금의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연결하고자 한다.
작가는 모국과 타국의 여러 장소에서 거주했던 기억과 그 과정에서 겪은 혼란,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던 자기 정체성의 흐름을 표류의 시간으로 인지한다. 역사성을 지닌 사물, 사적 공간으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하는 손잡이, 지워지고 흐려지고 덧입혀진 풍경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시선으로 빚어진 허구를 뒤섞으며,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내면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구성하는 시간에 따라 타오르고 녹아내리고 굳어진 양초들은 표류해 왔던, 그리고 여전히 표류하고 있는 작가 자신과 이동하는 모든 개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두고 올 수도, 그렇다고 들고 올 수도 없었던 시절들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스스로의 여러 표상을 녹여, 흐르는 물질이자 순간적 현상으로서 현재의 어떤 덩어리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개인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어쩌면 지금의 자신조차도 허상일지 모르는, 존재의 유동성을 들여다보고자 한다.